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주앙 2세]] ==== 1481년 8월 28일, 아폰수 5세는 리스본에 창궐한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신트라 궁전으로 피신했다가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주앙 2세]]'''는 즉위 직후 대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 원정과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 등 대귀족들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수많은 특권을 하사했다. 이 때문에 브라간사 공작, 비세우 공작 등 대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었다. 그는 대귀족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그들을 숙청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는 왕이 자신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부부왕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포르투갈을 공격해서 주앙 2세를 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주앙 2세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던 이들 몇 명이 도중에 배신하고 주앙 2세에게 페르난두 2세가 카스티야 왕국에 보낸 서신을 보여줬다. 1483년, 주앙 2세는 페르난두 2세를 긴급 체포한 뒤 22일간 카펫이 깔린 방에서 21명의 판사, 귀족, 기사들로 구성된 약식 재판을 거행한 후 사형을 선고했다. 페르난두 2세는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인 6월 20일에 에보라 광장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1484년, 주앙 2세의 왕비 레오노르의 형제이자 비세우 공작인 디에구는 왕이 세루발 해변으로 행차했을 때 등 뒤에서 단검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왕이 해변이 아닌 육지로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고,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한 공모자 몇 명이 왕에게 밀고했다. 주앙 2세는 디에구를 궁전에 소환한 뒤 그를 단검으로 직접 찔러 죽였다. 그 후 비세우 공작의 어머니 베아트리스에게 2명의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알리게 했고, 디오구의 형제인 [[마누엘 1세]]에게도 서신을 보내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아폰수가 죽고 더 이상 합법적인 자녀가 없다면 마누엘이 국왕 직위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후 음모에 관련된 80명 이상의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카스티야로 추방했는데, 그 중엔 에보라 주교인 가르시아 데 메네세스도 있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사건을 정리한 뒤 귀족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인의 하인이 아니라 주군의 주군이다." 이후 대귀족들은 주앙 2세를 두려워해 감히 도전하거나 음모를 꾸미지 못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왕권 확보에 성공한 그는 아버지가 중단했던 해양 탐사 사업을 재개했다. 기니 만에 대한 탐사와 무역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는데, 특히 이 지역의 층적층에 매장된 [[사금]]을 다룬 교역소를 건설하게 했다. 아울러 인도로 향하는 바닷길 탐색을 자기 대에 이루기로 마음먹고 여러 탐험가들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그의 치세 동안 아래의 발견이 이뤄졌다. * 1484년: 디오구 캉이 [[콩고 강]] 어귀를 발견하고 [[나미비아]] 해안을 탐험했다. *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고 유럽인 최초로 [[인도양]]을 항해했다. * 1493년: 알바루 드 카미나가 [[무인도]]였던 [[상투메 프린시페]] 제도를 식민화했다. 프린시페 섬은 주앙 2세의 외아들 알폰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495년: 인도로 가는 항로로 향할 첫번째 함대가 결성되었다. 에스테방 드 가마가 원정 함대를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주앙 2세와 에스테방 모두 얼마 후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궁정에 방문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한다면 아프리카 대륙 해안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인도로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며 자신의 항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앙 2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일부 학자들은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스페인 왕국]]이 개입할 것을 우려해 비밀에 붙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는 게 보다 빨리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프리카를 우회해 인도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을 오랫동안 추진하여 이제 결실을 거둘 기미가 보이는데 이제와서 새 항로 탐색에 돈을 쓸 이유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해양 탐사에 열을 올리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종종 스페인 측 탐험가들과 충돌했고, 급기야 해상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에 따라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 시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구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신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 섬 사이의 정가운데를 관통하는 경선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선으로 삼고,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서쪽은 에스파냐가,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이렇듯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2세의 치세에 해양 탐사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지만, 그는 후계자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폰수는 1491년 타구스 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사생아]]인 조르즈를 합법화하고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493년 비세우 공작 [[마누엘 1세]]에게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누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주앙 2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확정지었다. 이후 1495년 10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는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